효명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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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12-05 03:13 조회9,5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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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은 한다” 사심없는 지적
7년간 기도…모친을 불자로
줄곧 큰스님을 시봉하면서 살아 어느덧 큰스님의 모습을 닮아버린 스님이 있다. 행동거지도 말투도 그렇고 법상에서 설법하는 모습도 영낙없는 큰스님의 복사판 그대로다. 그래서 법상에 오르신 큰스님을 뵈면 큰스님을 닮은 도반이 생각나 문득 웃음을 짓기도 한다.
효명스님은 고산 큰스님 시봉이다. 강원에서 함께 공부할 때 말투와 행동거지를 어찌나 노스님같이 하는지 젊은 스님이 왜 그렇게 행동을 하는가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다. 유난히 꼿꼿한 자세와 엄격한 태도에, 공을 많이 들여 빳빳하게 풀먹인 무명옷을 즐겨 입었는데 곁눈질 한번 하는 일을 보지 못했다. 경을 읽을 때는 진지하고 긴장된 태도로 신중에 신중을 다하고 맡은 소임은 철저하여 빈틈을 용납하지 않는 고지식함이 줄줄 흘러나왔다.
언젠가 겨울안거에 선방 용맹정진에 들어가려고 대중의 신청을 받는데, 효명스님이 며칠 말미를 주었으면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몸을 추스려본 다음에 결정을 하려나 생각하고 며칠을 지냈는데, 그 철 용맹정진은 어렵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이미 여러차례 용맹정진을 마친 터라 꼭 들어가야 할 이유도 없었고 건강이 허락지 않아 그런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며칠 뒤 우연히 알게된 사실은 효명스님의 고지식한 일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야기였다.
혹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가 대중스님들께 누라도 끼치게 될까봐 말미를 얻은 며칠동안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정진을 했다는 것이다. 미리 힘을 얻어 함께 정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한 일이지만 낮에도 따로 쉴 수 없는 꽉 짜인 강당생활에,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며칠 밤을 새웠으니 배겨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럿이 함께 정진하면 설혹 힘이 약한 스님이라도 대중의 힘으로 버틸 수 있지만 남들 다 자는 밤에 혼자 깨어 하는 정진은 몇 배 힘이 드는 일이다. 미련스럽기까지 했던 그 일은 이후 대중용맹정진 들어가기 전에 혼자 용맹정진을 해 마친 괴팍한 스님이라고 가끔씩 도반들의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물론 악의 없는, 깊은 애정에서 하는 말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던 효명스님의 속가 모친이 아들을 보러 절에 찾아왔는데 몇 가지 이유로 법당에 참배를 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스님은 아들을 만나러 왔으면 당연히 아들의 스승에게도 예를 표해야 하는 것이니 법당에 가서 참배할 것을 당부했단다. 그렇게 출가한 아들의 인연을 가지고도 불교의 인연을 맺지 못하던 모친을 7년 세월동안 꾸준히 설득하고 불법을 전해오다가 결국 기도의 원을 세워 불자로 만들었다. 출가한 몸으로 먼저 가족을 제도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포교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자기 확인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대중살이에 조금 머트러운 점이 있어도 서로 얼굴 붉히기 싫어 그냥 넘어가는 일이 있기도 했는데, 성격이 깐깐한 효명스님은 그래도 할말은 해야 한다며 사심없는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혹 도반들의 소임에 실수가 있으면 대중이 불편해 할까봐 솔선해 대신 해주는 자상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차를 좋아해서 팽주 자리에 앉아 도반들에게 차 우려주기를 즐겨하였고, 맛있는 차를 위해 약수를 뜨러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대중이 산행을 갈 때면 대부분 간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는데, 유독 혼자 무명옷에 털신과 고무신을 고집하면서도 자신은 복장이 그것 뿐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자신의 방식을 지키곤 했다.
그런 고지식한 모습으로 무장한 효명스님이지만 가끔씩 지대방에서 도반들과 격식 없는 자리를 함께 할 때면 나름대로 우스개 소리도 하고 소리내어 웃기도 하면서 어우러지는 대중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원을 마치고 은사스님을 시봉하면서는 일년에 한 철은 반드시 선방을 가도록 하겠다는 허락을 얻어 수좌와 소임을 겸하는 철저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철을 나지 않을 때는 정진중인 사형제들과 도반스님들을 찾아다니며 대중공양으로 뒷바라지 하고 자신도 다만 일주일이라도 시간을 내어 보궁과 기도처를 찾아 기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주지소임을 맡고부터는 절에서 운영하는 불교대학의 강의를 직접 챙기면서 신도교육은 스님이 시켜야 한다며 스님들로 강의를 채우는 열성을 보여준다. 강의가 끝나면 녹음테이프를 꼼꼼히 챙겨듣는 치밀함을 가져 효명스님의 혜원정사 불교대학 강의를 부탁받는 스님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 강의가 끝나고 식당에 노래방 기계를 설치해 스님들과 신도들이 어우러져 노래한마당을 만드는 여유를 가지기도 한다.
큰스님을 모시고 사는 주지소임이 수월하지도 자유롭지도, 또 뜻대로 되지도 않을 텐데 이미 큰스님을 닮아버린 효명스님은 그런 생활이 무척 즐거운 모양이다.
7년간 기도…모친을 불자로
줄곧 큰스님을 시봉하면서 살아 어느덧 큰스님의 모습을 닮아버린 스님이 있다. 행동거지도 말투도 그렇고 법상에서 설법하는 모습도 영낙없는 큰스님의 복사판 그대로다. 그래서 법상에 오르신 큰스님을 뵈면 큰스님을 닮은 도반이 생각나 문득 웃음을 짓기도 한다.
효명스님은 고산 큰스님 시봉이다. 강원에서 함께 공부할 때 말투와 행동거지를 어찌나 노스님같이 하는지 젊은 스님이 왜 그렇게 행동을 하는가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다. 유난히 꼿꼿한 자세와 엄격한 태도에, 공을 많이 들여 빳빳하게 풀먹인 무명옷을 즐겨 입었는데 곁눈질 한번 하는 일을 보지 못했다. 경을 읽을 때는 진지하고 긴장된 태도로 신중에 신중을 다하고 맡은 소임은 철저하여 빈틈을 용납하지 않는 고지식함이 줄줄 흘러나왔다.
언젠가 겨울안거에 선방 용맹정진에 들어가려고 대중의 신청을 받는데, 효명스님이 며칠 말미를 주었으면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몸을 추스려본 다음에 결정을 하려나 생각하고 며칠을 지냈는데, 그 철 용맹정진은 어렵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이미 여러차례 용맹정진을 마친 터라 꼭 들어가야 할 이유도 없었고 건강이 허락지 않아 그런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며칠 뒤 우연히 알게된 사실은 효명스님의 고지식한 일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야기였다.
혹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가 대중스님들께 누라도 끼치게 될까봐 말미를 얻은 며칠동안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정진을 했다는 것이다. 미리 힘을 얻어 함께 정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한 일이지만 낮에도 따로 쉴 수 없는 꽉 짜인 강당생활에,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며칠 밤을 새웠으니 배겨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럿이 함께 정진하면 설혹 힘이 약한 스님이라도 대중의 힘으로 버틸 수 있지만 남들 다 자는 밤에 혼자 깨어 하는 정진은 몇 배 힘이 드는 일이다. 미련스럽기까지 했던 그 일은 이후 대중용맹정진 들어가기 전에 혼자 용맹정진을 해 마친 괴팍한 스님이라고 가끔씩 도반들의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물론 악의 없는, 깊은 애정에서 하는 말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던 효명스님의 속가 모친이 아들을 보러 절에 찾아왔는데 몇 가지 이유로 법당에 참배를 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스님은 아들을 만나러 왔으면 당연히 아들의 스승에게도 예를 표해야 하는 것이니 법당에 가서 참배할 것을 당부했단다. 그렇게 출가한 아들의 인연을 가지고도 불교의 인연을 맺지 못하던 모친을 7년 세월동안 꾸준히 설득하고 불법을 전해오다가 결국 기도의 원을 세워 불자로 만들었다. 출가한 몸으로 먼저 가족을 제도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포교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자기 확인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대중살이에 조금 머트러운 점이 있어도 서로 얼굴 붉히기 싫어 그냥 넘어가는 일이 있기도 했는데, 성격이 깐깐한 효명스님은 그래도 할말은 해야 한다며 사심없는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혹 도반들의 소임에 실수가 있으면 대중이 불편해 할까봐 솔선해 대신 해주는 자상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차를 좋아해서 팽주 자리에 앉아 도반들에게 차 우려주기를 즐겨하였고, 맛있는 차를 위해 약수를 뜨러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대중이 산행을 갈 때면 대부분 간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는데, 유독 혼자 무명옷에 털신과 고무신을 고집하면서도 자신은 복장이 그것 뿐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자신의 방식을 지키곤 했다.
그런 고지식한 모습으로 무장한 효명스님이지만 가끔씩 지대방에서 도반들과 격식 없는 자리를 함께 할 때면 나름대로 우스개 소리도 하고 소리내어 웃기도 하면서 어우러지는 대중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원을 마치고 은사스님을 시봉하면서는 일년에 한 철은 반드시 선방을 가도록 하겠다는 허락을 얻어 수좌와 소임을 겸하는 철저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철을 나지 않을 때는 정진중인 사형제들과 도반스님들을 찾아다니며 대중공양으로 뒷바라지 하고 자신도 다만 일주일이라도 시간을 내어 보궁과 기도처를 찾아 기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주지소임을 맡고부터는 절에서 운영하는 불교대학의 강의를 직접 챙기면서 신도교육은 스님이 시켜야 한다며 스님들로 강의를 채우는 열성을 보여준다. 강의가 끝나면 녹음테이프를 꼼꼼히 챙겨듣는 치밀함을 가져 효명스님의 혜원정사 불교대학 강의를 부탁받는 스님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 강의가 끝나고 식당에 노래방 기계를 설치해 스님들과 신도들이 어우러져 노래한마당을 만드는 여유를 가지기도 한다.
큰스님을 모시고 사는 주지소임이 수월하지도 자유롭지도, 또 뜻대로 되지도 않을 텐데 이미 큰스님을 닮아버린 효명스님은 그런 생활이 무척 즐거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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