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스님 시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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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08-01 03:03 조회7,6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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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 시봉일기
원표|치문과 (계간 청암 2011년 봄호에서 옮겨 싣습니다.)
내가 절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은사스님께서 같이 일할 때 누구든지 꾸물거리거나 스님마음에 들도록 일하지 않을 경우 고함을 지르시고 호통 치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 또한 스님께서 큰 소리를 내실까 조마조마 했었다.
그러다가 역시 걱정했던 대로 스님의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어느 날 방안에 계시던 스님께서 나를 찾기 시작하셨다. “원표야!”하고 부르는 소리에 다급해진 나는 건넛방으로 도망을 쳤다.
스님께서는 나를 보시고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느냐고 화를 내셨다.
그 후 며칠이 지나고 스님께서 내게 물으셨다. “넌 내가 어렵냐?” 난 나름대로 은사스님께 솔직하게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섭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의외로 스님께서는 화를 내시지않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시며 어른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과 사람을 무서워 하는 것은 다르다고, 어른은 어렵게 생각해야하는 것이지 무서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계를 받으러 행자교육원에 갔을 때 갈마위원스님께서 소임이 뭐냐고 물으셨다. 난 시자라고 대답했고, 연이어 시자소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셔서 난 “정성입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난 나름대로 정성이 중요한 걸 알고 있었지만 은사스님은 늘 내가 일하기 싫어 뺀질거린다고 하셨다. 원표등에 ‘말 안듣는 원표’라고 적어야 한다고 하셨다.
스님께서 부르시면 곧 바로 달려가는 노력을 했지만 멀리서부터 나를 보신 스님은 내겐 들리지 않는 소리로 심부름을 시키시고 문을 닫으신다. 스님방에 들어가 다시 묻기가 어려워 되돌아오면 나중에 왜 시키는 일을 제대로 안했느냐고 꾸중을 하신다.
처음엔 스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내 귀가 잘 안 들리는 건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지 답답해 할 때 도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느끼게 된 것이지만 내 생각으로 꽉 차있어서 스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리지 않은 것이었다.
“오봉에 다 담아 와라.”
“예.” 대답은 재빨리 하지만 ‘오봉’이 무엇인가 후에 생각한다.
오봉, 왠지 오목한거 같아 우동그릇을 드렸다.
쉬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저지르는 나를 스님께서는 항상 변함없이 이해해주시고 받아주셨다. 주변의 스님들이 은사스님께서 너무나 많이 변하셨다는 말을 해주며 나보다 먼저 은사스님의 그런 배려를 알고 있었다. 대중 공양으로 팥빵을 사오신 은사스님은 팥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크림빵을 한 개 사다주신 적이 있었다. 작은 것 까지도 신경써주시는 스님을 난 제대로 잘 챙겨드리지 못했다.
스님께서는 내게 ‘향심’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눈이 오는 날 스님 신발을 들여놓지 않아 눈을 맞게하고 비오는 날 우산을 챙겨드린 적이 없고 스님께서 아끼시는 화분도 잘 보살피지 못했다. 그러나 난 스님께서 어떤말씀을 하셔도 말대답이나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의의 차원이 아니라 내마음 진심으로 스님의 말씀이 이치나 경우에 어긋나지 않음을 신뢰하고 마음속 깊이 스님께서 날 아껴주시는 맘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청암사로 오던날 “방학돼도 다른데 갈 생각마라.” 날 걱정하시는 말씀에 난 통장과 도장을 드리며 설날에 받은 세뱃돈을 좀 입금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순간 스님의 표정에서 안도감을 읽을 수 있었다.
청암사로 오기전 스님께서 행자님들과 나를 부르시고는 내게 시자소임을 인수인계하라고 말씀하셨다. 다른때 같으면 바로 나오던 ‘예’대답도 그날은 하지 못했다. 시자 소임을 제대로 살지 못한, 그래서 스님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 한 죄송함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원표|치문과 (계간 청암 2011년 봄호에서 옮겨 싣습니다.)
내가 절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은사스님께서 같이 일할 때 누구든지 꾸물거리거나 스님마음에 들도록 일하지 않을 경우 고함을 지르시고 호통 치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 또한 스님께서 큰 소리를 내실까 조마조마 했었다.
그러다가 역시 걱정했던 대로 스님의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어느 날 방안에 계시던 스님께서 나를 찾기 시작하셨다. “원표야!”하고 부르는 소리에 다급해진 나는 건넛방으로 도망을 쳤다.
스님께서는 나를 보시고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느냐고 화를 내셨다.
그 후 며칠이 지나고 스님께서 내게 물으셨다. “넌 내가 어렵냐?” 난 나름대로 은사스님께 솔직하게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섭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의외로 스님께서는 화를 내시지않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시며 어른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과 사람을 무서워 하는 것은 다르다고, 어른은 어렵게 생각해야하는 것이지 무서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계를 받으러 행자교육원에 갔을 때 갈마위원스님께서 소임이 뭐냐고 물으셨다. 난 시자라고 대답했고, 연이어 시자소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셔서 난 “정성입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난 나름대로 정성이 중요한 걸 알고 있었지만 은사스님은 늘 내가 일하기 싫어 뺀질거린다고 하셨다. 원표등에 ‘말 안듣는 원표’라고 적어야 한다고 하셨다.
스님께서 부르시면 곧 바로 달려가는 노력을 했지만 멀리서부터 나를 보신 스님은 내겐 들리지 않는 소리로 심부름을 시키시고 문을 닫으신다. 스님방에 들어가 다시 묻기가 어려워 되돌아오면 나중에 왜 시키는 일을 제대로 안했느냐고 꾸중을 하신다.
처음엔 스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내 귀가 잘 안 들리는 건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지 답답해 할 때 도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느끼게 된 것이지만 내 생각으로 꽉 차있어서 스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리지 않은 것이었다.
“오봉에 다 담아 와라.”
“예.” 대답은 재빨리 하지만 ‘오봉’이 무엇인가 후에 생각한다.
오봉, 왠지 오목한거 같아 우동그릇을 드렸다.
쉬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저지르는 나를 스님께서는 항상 변함없이 이해해주시고 받아주셨다. 주변의 스님들이 은사스님께서 너무나 많이 변하셨다는 말을 해주며 나보다 먼저 은사스님의 그런 배려를 알고 있었다. 대중 공양으로 팥빵을 사오신 은사스님은 팥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크림빵을 한 개 사다주신 적이 있었다. 작은 것 까지도 신경써주시는 스님을 난 제대로 잘 챙겨드리지 못했다.
스님께서는 내게 ‘향심’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눈이 오는 날 스님 신발을 들여놓지 않아 눈을 맞게하고 비오는 날 우산을 챙겨드린 적이 없고 스님께서 아끼시는 화분도 잘 보살피지 못했다. 그러나 난 스님께서 어떤말씀을 하셔도 말대답이나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의의 차원이 아니라 내마음 진심으로 스님의 말씀이 이치나 경우에 어긋나지 않음을 신뢰하고 마음속 깊이 스님께서 날 아껴주시는 맘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청암사로 오던날 “방학돼도 다른데 갈 생각마라.” 날 걱정하시는 말씀에 난 통장과 도장을 드리며 설날에 받은 세뱃돈을 좀 입금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순간 스님의 표정에서 안도감을 읽을 수 있었다.
청암사로 오기전 스님께서 행자님들과 나를 부르시고는 내게 시자소임을 인수인계하라고 말씀하셨다. 다른때 같으면 바로 나오던 ‘예’대답도 그날은 하지 못했다. 시자 소임을 제대로 살지 못한, 그래서 스님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 한 죄송함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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